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로마 황제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직위와 칭호의 세습, 제정의 제도화 ===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직위들 중 임페리움 마이우스와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다. 즉, 로마 공화국의 상속법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에게 이 전대미문의 막강한 권한을 상속해 줄 수 있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 직위 자체는 상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각료·국회의원·법관·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인사권과 국군통수권, 국회 입법에 대한 거부권 등은 현직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에게 상속할 수 있으며, 이 권한을 상속받은 사람에게 국회가 대통령 직위를 사후승인 같은 느낌으로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현대 민주공화국 국민의 관점에서 공직을 재산으로 여겨 친족에게 상속한다는 개념은 미친 일 같겠지만 전근대에는 그다지 특이한 개념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습군주정 자체가 권력을 사유재산으로 취급함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일종의 재산으로 여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도 그 유래가 로마 시대 관직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다.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반기가 되면, 어떤 로마인도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한 로마인이 됐다. 본인은 《업적론》에 단 한번도 조상들의 관습에 어긋난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술라, 카이사르조차 대놓고 휘두르지 못한 것을 교묘한 술수로 완전히 장악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을 넘어선 포메리움(pomerium)이었다. 포메리움이란 '도시(로마 시)와 로마 공화국이 통제하는 도시 주변의 종교적 경계'를 뜻했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오직 로마는 포메리움에서만 존재했고, 그 너머의 모든 것이란 단순히 로마에 속한 영토, 즉 속주와 동맹국 정도만을 의미했다. 따라서 로마인이 말하는 국가란 곧 포메리움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했다.[* 로마 공화국과 여신 로마의 가호를 기념하는 행사가 매년 1월 1일 새해와 매년 4월 21일 도시 로마 건국 기념일에 열렸다.] 또 "존엄한 본국"인 포메리움 안에서는 모든 로마인은 무기를 휴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기가 되면 이 포메리움을 완벽히 손에 넣고 법리적으로 본인과 포메리움을 동일시 시키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그의 앞과 그 주변에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금지되었으며, 오직 본인과 그의 직접 지시를 받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대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는 호민관 특권에 포함된 신변 불가침권 외에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는데, 단순히 호민관 특권으로만 보호되던 시절에는 그는 민형사상 면책특권을 누리며 그 개인에 대한 침해만이 [[내란죄]]나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되었을 뿐이지만, 포메리움과 동일시된 이후로는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반역죄로 처벌되게 되었으며 그에게 적대하는 자는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에게 그러했듯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 그는 수십년 동안 이를 천천히 체득하는데 많은 정치적 사건을 경험해야 했다. 로마법 체계 내에서 많은 논리적 비약과 적절한 입법을 통해 "아우구스투스=국가"로 해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암살 미수 음모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반역죄를 활용했다. 기원전 80년 [[술라]]가 자신의 무소불위 권력을 쥘 때의 절차를 거울 삼아 서기 4년 전후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권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또 한 가지 마련해둔 권력의 장치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개념이었다. 그가 양자로 삼은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사망 이후,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입양하고 공석이 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에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앉혔다. 이때 그는 이 두 사람을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묶어두었는데, 이를 통해 양자 티베리우스의 계승권을 확실히 잡아둠과 동시에 자신의 혈육들에게도 자신의 권위가 상속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둔다. 그리고 자신 일가의 또 다른 칭호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 즉 게르마니쿠스라는 큰 권위를 내포한 이름을 내세웠는데, 이는 자신이 친아들이라고 여겨 후계자로 점찍어두었던 [[대 드루수스]](티베리우스의 동생)가 게르마니아 공략을 통해 얻었던 명예로운 칭호였으나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자 대 드루수스의 장남의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을 아예 게르마니쿠스로 삼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하였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될 남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명예로운 이름과 [[대 드루수스]]의 좋은 이미지까지 물려받도록 조치해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도 제대로 작동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달리, 대 드루수스와 그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및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은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대 드루수스가 처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로 불리면서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됐다. 그는 본인과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요절한 대 드루수스, 살아 있는 티베리우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를 콕 집어 포메리움과 모스 마이오룸의 모범자이자 수호자로 규정하면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명명했다. 이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클라우디우스]] 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동일시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및 중역의 자리를 마련해주어 친위세력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범주를 통해 황제위 (즉, 위의 임페라토르를 비롯한 모든 직책을 겸임하게 될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계승권과 가까운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간의 구분 역시 교묘하게 만들어 두었다. 이와 같은 분배를 통해 그는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직책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가 물려받는 것으로 구체화시켜 합법적으로 이 직위를 세습시킬 수 있는 구도를 잡아두었다. 따라서 이 직책들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직위가 돌아가는 순서인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순으로 합법적으로 세습되도록 설계되었다. 이때 죽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일원으로 포함된 덕분에 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위를 승계할 기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공화정 전통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당대 로마인들에게 임페라토르는 여전히 개선장군만이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롭고 선망받는 호칭이었다. 이 호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위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화정 후기에는 사소한 공을 세운 지휘관들조차 개선식을 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자신을 임페라토르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런 무리한 요구 자체가 빈축을 샀으며 정치적 사정으로 이런 경우에도 개선식이 허용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당연히 당대 로마인들도 이름뿐인 개선식과 '임페라토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빠르게 잊혀졌다. 따라서 작은 공적을 들먹이면서 억지로 개선식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었고 이는 자신의 후계자들이 모두의 경외를 살 권위를 갖기를 원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그림과는 맞지 않았고 나아가 황제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게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이 확립된 시대의 후대 황제들과는 달리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등 후계자 후보들을 최전선에 파견해 앞으로 받게 될 임페라토르 호칭에 어울리는 군공을 쌓도록 하고, 개선식을 치러주며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일정 수준 정도로는 성과를 거두어서 아우구스투스가 원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대 드루수스]]는 그의 판단, 계획대로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스타일의 병력운용,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낙마 사고로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약식 개선식 직전 요절했다. 그리고 부적절한 경우도 많아서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밑에서 군사 참관 수업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만 20세도 안 된 나이에 동방 시찰과 대 파르티아 외교 교섭이라는 나이에 비해 매우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가 실패하고 객사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가던 중 중간 기착지 마르세유에서 병사했다. 이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대 드루수스가 알페스 산맥 파견 근무 후 갈리아 전역을 관할한 총독 역을 맡김과 비슷했다. 워낙 무리했던 조치라서 가이우스의 후계자 등극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노망이 나 자기 핏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욕심에, 함량미달 철부지를 내세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제위 후계자들은 가이우스 나이 때 로마에서 제왕수업을 받았지 노회한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외지에 파견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친 부담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핏줄들을 매우 아끼기는 했지만, 권력구도 문제에서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일관되게 해온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두 손자에게만 팔불출 할아버지처럼 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우구스투스가 두 후계자들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증유의 제위세습을 위해 급히 실적을 만들어야만 하던 사정이 있었다. 공화정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시기에 원로, 실력자와 영웅들에게 수여되던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 프린캡스 세나투스, 임페라토르, 폰티펙스 막시무스, 켄소르 등은 하나같이 공화정기 최고 명문가의 실력자들이 거쳐가거나 수여받은 관직과 명예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지방유지도 군공만 있으면 가능했던 임페라토르를 빼면, 실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문까지 따라줘야 이런 관직과 칭호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들로 정당화되던 황제 자리를 사상 최초로 세습하려면 이에 걸맞은 실적을 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실패는 개인적 역량부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대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서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임무를 무리하게 맡긴 건, 아우구스투스의 높은 기대 때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고작 '''18살'''에 혼란의 도가니탕이자 위험도가 매우 높은 로마의 정치판에 올라가서 아우구스투스까지 올라갔으니 자신의 핏줄이라면 그 때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한참 낮은 수준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자수성가]]해서 큰 일을 이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도 본인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인재로 착각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실수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인의 수준이 [[천재]] 소리를 들을 수준으로 높으므로 일반인에 대한 기준점을 너무 높아서 [[수재]]급 인물을 일반인 수준으로 본다는 문제가 있다.[* 해결책은 기준점을 바닥까지 낮춰서 천하의 멍청이 수준으로 잡은 후에 거기에 걸맞게 임무를 부여해본 후 성공하면 해당인에 한해서 기준점을 약간 올려주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간신히 일반인을 일반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귀국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사건으로 입은 상처로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양손자들로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후일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주목했다. 이는 엄연히 원로원, 로마 귀족적 전통상 친혈육 후광, 보호자로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술한 특성상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형제는 아직 군복무 경험이 없고, 이중 둘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그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집권 뒤 꾸준히 쓴 《업적론》에서 '내 아들'이라고 계속 언급해온,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중간 다리로서 살아생전 이를 물려주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서기 12년 10월,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양자 입적 전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이며, 12살때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아들'로 로마 대중들에게 [[악티움 해전]] 승리 후 개선식에서 소개됐다.]의 이름으로 거행된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으로 화려하게 공개한다. 물론 이때도 그는 공화정의 전통과 자신의 정치적 기술을 교묘히 섞어 사용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40년 넘게 개인이 단독으로 로마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쥐고, 죽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그 통치권을 물려주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수십년동안 지속된 '''아주 자연스럽고 교묘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들은 자연스레 그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의 승계를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했고, 이를 원로원조차 과반수 이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건 후대의 사건에서도 입증되는데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이 [[유피테르]] 신전에서 소집될 당시, 원로원 회의에서는 대부분 참석자들은 공화정 복귀를 원했다. 그렇지만 정작 회의 내내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는데, 굳이 선언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계속 나왔을 정도로 그 해석에 대해 논의가 계속되었다. 또 "이 기회에 카이사르 가문 사람 내 남자 후계자에게 나라를 맡겨선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 부분도 주제로 논쟁을 이어갔는데, 대략 결론은 "임페라토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인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그 권한은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이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도 부모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며, 율리우스 씨족이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카이사르 가문이 네로 가문인건 자명하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소속 남성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식이었다. 또 그는 [[숙청|정적 제거]] 수단으로 두 가지의 무기를 만들어내거나 지위를 이용해 활용했다. 그것이 바로 율리우스 간통법과 반역 처벌법인데, 반역죄 처벌법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제1차 국가 조정' 조치 후 원로원에게 합법적으로 국가 원수로 인정받으면서 얻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기원전 2년 '파테르 파트리아이(조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칭호를 원로원에게 수여받아 로마 공화국의 재건자이자 공화정 회복의 수호자로 확고하게 올라섰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자연스레 마무리지은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 이래 제위계승계획을 순조롭게 꾸밀 수 있었다. 그는 76회 생일을 앞두고 완벽하게 본인이 가진 임페라토르라는 합법적 지위 등을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공화정 시대의 전통처럼 스스로 나이가 고령임을 들어 연회와 원로원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등 공적 업무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를 위한 각종 영예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는 임페라토르 직을 유지했으며, 군통수권과 호민관 특권 등도 내놓지 않았다. 그는 포메리움의 현세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에 공식 활동을 줄여 나가도, 영원히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혼란스러운 내전없이 14년 8월 19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추인아래 '''로마 건국 이래 최초의 부자상속'''으로 권력을 쥐게 된다. 물론, 이런 순조로움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며칠 전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 사저 주변에 배치해 경호하게 한다. 그러면서 두 근위대장을 두 집정관에게 보내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충성한다."는 충성서약을 받아낸 뒤, 두 집정관을 압박해 원로원을 소집하라고 한 뒤, 두 집정관이 자발적으로 원로원 전체에게 '일개 원로원 의원'임을 무한하게 강조한 티베리우스에게 단체로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를 만들게 했다.[* 이런 이유로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이중적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씹어댔다.] 또 자신의 장례식에 프라이토리아니를 각 대대별로 도열하게 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단체로 외치게 하면서 로마 시가지를 행진하도록 했다. 여기에 덧붙여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자신의 혈육과 가문이 그 다음 순위의 임페라토르라는 것도 얻어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